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갈릴레오는 실험과 수학의 혁신적 조합을 통해 운동에 관한 과학에 기여를 했다. 1609년 망원경을 계량하여 이것을 천체 관측에 응용해 목성의 위성,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했다. 이듬해 피렌체 대공인 메디치 가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해 연구를 계속했다. 1610년 갈릴레오는 1월 내내 밤중에 하늘을 관측한 끝에 금성이나 화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목성 주위를 배회하는 세별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이 별들은 목성 주위를 도는 목성의 위성이다. 목성의 위성들에 대한 그의 천체 관측 사항들을 이용해 태양 중심설, 즉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톨레마이어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인 지구중심설에 대항하는 우주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책을 펴냈다. 다음 해 갈릴레오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던 예수회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에게 자신의 망원경의 성능을 증명하고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 목성의 4개 위성들과 관련된 사실들을 보도록 하기 위해 로마에 방문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됐다. 갈릴레오는 정확하지 않은 망원경 서술에 기반해 1609년에 네덜란드에서 만든 3 배율 망원경을 개량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 망원경을 개량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 망원경을 개량해 30 배율 망원경도 만들었다. 그는 이 발전된 망원경을 통해 더 확대한 올바른 이미지를 지구에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소형 망원경과 같은 망원경이다. 그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고 한동안 갈릴레오는 각기 목적에 알맞은 망원경을 제작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1609년 8월 25일 그는 첫 망원경을 베네치아 입헌자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망원경 재작은 망원경이 무역업과 무역과 관련된 여러 일들에 있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인들이 이용 적당한 측선을 제작할 수 있도록 했다. 1610년 3월에 갈릴레오는 별에서 온 메신저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그의 초기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학적 관측을 발표했다. 1610년 1월 7일 갈릴레오는 그의 망원경을 이용해 그가 당시 주장한 세 개 별 모두는 목성에서 일렬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너무 작아서 거의 볼 수 없는 세 개의 고정된 별들에 대해 관찰했다. 그리고 목성과 연관 있는 이들 별들의 위치는 만약 그 별들이 진짜로 고정된 별들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변한다는 것을 다음날 관측을 통해 알았다. 1월 10일에 갈릴레오는 그 별들 중 하나가 사라졌음을 지적했으며 관측을 통해 갈릴레오는 사라진 별이 목성 뒤로 숨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며칠 내로 갈릴레오는 그 별들이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결론 내렸으며 갈릴레오는 갈릴레오는 세 개의 목성의 4대 위성을 발견했고 이는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였다. 그는 또다시 1월 13일에 네 번째 위성인 가니메데를 발견했다. 갈릴레오는 이 4대 위성에 그의 미래의 후원자인 투스카니 공국의 군주 코시모 2세와 그의 세 형제를 기려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나중에 천문학자들은 갈릴레오 자신을 기려 갈릴레이 위성이라고 새로 이름을 붙여줬다. 작은 행성이 주변을 돌고 있는 한 행성의 발견은 모든 천체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천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처음에는 갈릴레오가 그런 별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길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계속해서 18개월에 걸쳐 위성들을 관찰했고 1611년 중반에 그는 그 별들의 주기에 대해 놀랄 만큼 정확한 측정을 했다. 1610년 9월부터 갈릴레오는 달의 위상 변화와 유사한 금성의 위상을 관찰했다. 태양계 중심적 모델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발전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미의 지구중심적 모델과는 반대로 금성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면 태양은 금성에 밝은 반구면을 만들고 이는 금성이 반대편에 있을 때 관찰 가능하고 금성이 태양의 지구 쪽에 있을 때 지구에서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금성의 모든 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반대로 프톨레미의 지구 중심적 모델은 단지 금성의 초승달과 같은 위상만 관측 가능하다고 예견했다. 갈릴레오의 금성의 위상에 대한 관찰은 금성이 태양 주변을 돌고 있음을 증명했고, 태양중심적 모델을 지지해주었으나 그 사실은 프톨레미적 지구중심적 행성 모델을 반박했기 때문에 갈릴레오의 관측이 매우 기괴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는 17세기의 대다수의 과학적 모임이 티코의 모델과 카펠라의 모델과 같은 지구 중심적인 모델로 전환하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했다고 한다. 갈릴레오는 또한 토성을 관찰했고 첫 번째는 토성의 고리가 세 개의 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가 나중에 토성을 관찰했을 때 그는 토성의 고리는 지구를 향해 나란히 있었고 이는 갈릴레오가 두 개의 고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했다. 1616년에 다시 토성을 관찰했을 때 그 고리가 다시 나타나서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1607년 케플러가 의도하지 않게 흑점을 발견했지만 그 것을 수성의 변화로 착각했기에 갈릴레오가 유럽인 중 최초의 흑점 관측자가 됐다. 또한 갈릴레오는 이전에 수성의 변화로 간주됐던 샤를마뉴의 시대로부터 흑점의 관찰을 재해석했으나 바로 그 흑점의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천체물리학에 의해 확립된 천체의 변하지 않는 완벽성에 관한 새로운 난점을 보여줬다.